Diary/QT

시편 3편을 읽고

Melphi 2015. 5. 29. 16:04

최근들어 시편을 한 편씩 읽기 시작했는데, 오늘 시편 3편을 읽었다. 


혹시 주변에 가끔 이런 말을 하는 사람을 본 적이 있는가? "저런 사람은 하나님이 언젠가 치실 것이다."  보통 이런 말을 하는 사람은 교회에 오래동안 다닌 사람이다. 나는 개인적으로 이런 말을 하는 사람을 매우 싫어한다. 자기가 그 사람을 싫어한다고 해서 하나님이 그 사람을 벌할 것이라는 매우 오만한 발상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마음에 가장 도전을 받는 경우 중 하나가 '천벌을 받아 마땅할 것 같은 악인이 세상에서 잘만 사는 것을 볼 때'이다. 하나님이 살아계시다면 어떻게 이런 불의한 일을 용납하실 수 있는가? 그러나 우리는 이러한 일을 비일비재하게 본다. '하나님이 인간을 치시는 행위'는 분명 우리가 생각하는 틀을 벗어나있다. 그러니 하나님이 벌을 내리시는 '시기'는 물론, 과연 이 세상에서 우리가 생각하는 세속적인 '방법'으로 악인을 파멸하실지의 여부 조차도 우리는 알 수가 없다. (예수님도 당시 유대인들이 생각했던 그런 방법으로 '구원자'가 되신 것이 아니지 않는가?) 그래서 "저런 사람은 하나님이 언젠가 치실 것이다" 같은 말을 하는 사람은 나는 매우 교만한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마치 자신이 하나님의 머리 속에 들어갔다 나온 사람처럼 말을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오늘 시편 3편에서 비슷한 말을 하는 사람이 나온다. 다름 아닌 이 3편의 저자인 다윗이다. 다윗은 7절에서 다음과 같이 부르짖고 있다.


Strike all my enemies on the jaw; break the teeth of the wicked. (NIV)
주께서 나의 모든 원수의 뺨을 치시며 악인의 이를 꺾으셨나이다. (개역한글)


개역한글에는 '...꺾으셨나이다' 라고 과거의 일을 기술한 것처럼 번역되어 있지만, NIV를 보면 '주께서 나의 모든 원수의 뺨을 치시며 악인의 이를 꺾으소서'라고 탄원(혹은 간구, petition)하는 것에 가깝다. 시쳇말로 '저놈들에게 싸대기를 날려주시고, 강냉이를 털어주시옵소서'라고 기도를 한 것이다. 하나님께 올리는 기도가 사랑으로 용서하는 마음을 갖게 해달라는 내용이 아니라, 내 적들을 파멸해달라는 무시무시한 내용이라니! 게다가 그 기도의 주인공이 밧세바와의 불륜을 제외하고는 줄곧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저버린 적이 없는 다윗 왕이라니...!


가벼운 마음으로 시편을 읽었다가 머리 속이 실타래처럼 마구 엉킨듯한 느낌이었다. 그래서 다시 한번, 또 한번 읽었다. 일단 이 3편을 쓴 시점에서의 다윗 왕의 상황은 아들 압살롬과 그를 따르는 신하들이 반란을 일으켜 목숨을 구하기 위해 도망을 다니던 때였다. 아끼던 아들과 부하들, 그리고 자기 자신이 속한 지파임에도 불구하고 등을 돌린 유다 지파의 칼을 피해, 수도인 예루살렘에서 겨우 빠져나와 비참하게 지방을 떠도는 상황이었던 것이다. 그래서 이 시에는 그런 그의 비통한 심정이 가득 담겨있다. 그 상황에서 하나님께 구원을 부르짖는 기도인 것이다. 4절에 이 기도의 성격이 분명하게 드러나있다.


I call out to the Lordand he answers me from his holy mountain.(NIV)

            내가 나의 목소리로 여호와께 부르짖으니 그 성산에서 응답하시는도다 (개역한글)


이 대목을 보는 순간 나는 무릎을 딱 쳤다. 이 시편은 기도인 것이다. 기도는 나와 하나님과의 대화이다. 그리고 지금의 상황에서 다윗은 하나님께 부르짖고 있다. 나를 이 어려운 상황에서 구해달라고. 내 적들을 물리쳐달라고. 다윗은 주변 사람들에게 '하나님이 언젠가 내 적들을 치실 것이다'라고 떠들고 다니는게 아니다. 직접 하나님께 내 적들을 쳐달라고 요청하는 것이다.


이 둘은 분명히 다르다. 전자는 마치 내가 하나님이 어떻게 행동하실지 '아는 척하는' 것이지만, 후자는 하나님에게 내가 원하는 것을 그대로 구하는 것이다. 기도에 있어서 내가 원하는 것을 구체적으로 구하는 것은 정말 중요하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우리와 관계를 맺는 것을, 우리가 기도로 간구하는 것을 즐거워하시기 때문이다. 교회에 오래 다닌 신자일 수록, 하나님께 내가 원하는 것을 솔직히 구하는 것을 어려워하는 경향이 있다. 나는 분명히 취직을 시켜달라고 간구하고 싶은데 하나님의 뜻대로 해달라고 한다. 나는 분명히 합격이 되기를 원하는데 하나님의 뜻대로 해달라고 한다. 그냥 다 하나님의 뜻대로 되게 해달라고 한다. 하나님의 뜻대로 해달라는게 나쁘다는게 아니다. 그렇게 기도하지 않아도 어차피 모든 일은 하나님의 뜻대로 되게 되어 있다. 문제는 그렇게 함으로써 내 속에 있는 이야기를 다 하나님께 100% 꺼내놓지 않고 기도를 피상적인 것으로 만든다는데 있다. 나의 모든 치부를 알고 계신 하나님과 대화를 하는데 체면은 무슨 소용이고 염치는 어디다 쓸 것인가? 내가 처한 상황을 그대로 밝히고 원하는 것을 이야기하는 것 자체는 전혀 나쁜 일이 아니다. 인간 관계에 있어서도 나의 속마음을 털어놓을 수 있는 사람이 정말 친한 친구라고 할 수 있다. 하나님과의 관계도 전혀 다르지 않다는 것이다. 하나님과의 친밀한 관계를 형성하기 위해서는 '나의 속이야기'를 해야 하는 것이다. 다윗이 '내 원수의 뺨을 쳐달라'고 간구할 수 있는 것처럼 말이다. 기도는 구체적이어야 한다. '내 아이의 병이 낫기를 원하는 기도'를 한다면 아이의 병을 낫게 해달라고 울면서 간구하지 않겠는가?


(반대로 초신자들은 원하는 것을 구하는 기도를 하는 것은 어려워하지 않지만, 내가 원하지 않는 결과가, 그것도 빠른 시일 내에, 나오지 않는 경우 쉽게 실망하고 하나님의 존재에 의문을 갖는다.)


마지막으로 시편 3편에서 주의깊게 보아야 할 것이 있다. 상황이 상황이니만큼 이 기도의 분위기가 무겁고 간구하는 내용이 무시무시하기는 하지만, 이 기도에서 오직 '간구'만 있는 것은 아니다. 다윗 왕은 3절에서 "But you, oh Lord, are a shield around me; my glory, the one who lifts my head high"(여호와여 주는 나의 방패시요 나의 영광이시요 나의 머리를 드시는 자니이다), 5절에서 "because the Lord sustains me" (여호와께서 나를 붙드심이로다), 8절에서 "From the Lord comes deliverance" (구원은 여호와께 있사오니) 라고 말하며 하나님이 나에게 어떤 존재인지에 대한 신앙고백을 분명하게 하고 있다. 특히 8절은 위에서 본 그 무시무시한 간구가 담긴 7절에서 바로 이어지는 부분으로, 결국은 하나님의 섭리대로 이루어질 것을 믿는 다윗의 신앙이 드러나있다. 원하는 것을 간구하기 이전에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는 올바른 기도의 자세를 보여주고 있다. 원하는 것을 간구한 이후에, 역시 주님의 주권을 인정하는 태도를 보여주고 있다. 애끓는 가운데서도 기도의 본연의 모습을 잃지 않는 것이 돋보였다.